[번역] Introducing Philosophy for Designers
Sean Voison의 Introducing “Philosophy for Designers”를 번역한 글입니다.
인간다움을 규정하는 특징 중 하나 — 어쩌면 우리를 다른 동물들과 가장 뚜렷하게 구분 짓는 요소 — 는 우리가 도구를 만드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기술(technology)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기술은 다시 우리를 만듭니다. 이처럼 인간과 도구가 서로를 형성하는 순환적 관계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자주 언급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 과학자 테리 위노그래드(Terry Winograd)와 페르난도 플로레스(Fernando Flores)는 『Understanding Computers and Cogni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도구를 설계하는 일이 곧 존재 방식을 설계하는 일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디자인의 본질적인 질문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친구였던 존 컬킨 신부(John Culkin) 역시 이와 유사한 통찰을 남겼습니다. 그는 지금은 널리 알려진 다음의 경구를 만들어냈죠:
“우리가 도구를 만들고, 그다음에는 도구가 우리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셰리 터클(Sherry Turkle)은 『Evocative Objects』에서 우리의 도구와 가장 소중한 소지품들이 종종 우리의 사고방식을 재구성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물과 함께 생각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사물을 사랑한다.”
만약 도구를 디자인하는 일이 정말로 “사랑”의 대상이자 “존재 방식”을 설계하는 일과 같다면, 우리가 만드는 것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그것들을 세상에 어떻게 내놓을지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해낼 수 있을까? 아니,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잘 해낼 수 있을까?
소프트웨어 세계에서 우리는 흔히 사용자 경험(UX) 디자인의 관점에서 위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곤 합니다. UX 디자이너들은 복잡한 디지털 경험을 설계하는 과제를 풀어내기 위해 심리학, 인지과학, 그래픽 디자인, 인류학 등 매우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참고합니다. UX 디자인의 즐거움이자 힘은 이처럼 탁월한 다학제성에 있습니다.
하지만 디자인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 속에서 유독 빠져 있는 분야가 하나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 분야는 AI 시대의 디자이너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철학입니다.
이제 제가 왜 이 글을 쓰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일주일 조금 넘게 전에, 저는 새로운 자기 주도적 학습 실험을 시작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학습 주제를 여러분과 나눌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이 프로젝트를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를 위한 철학: 윤리, 경험, 인지(Philosophy for Designers: Ethics, Experience and Cognition)
이 “디자이너를 위한 철학”이 어떤 내용인지 곧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그 전에 잠시 짧은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그해 저는 UC Irvine(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에서 “Arts Computation Engineering(ACE)”이라는 이름의 융합형 대학원 프로그램에 입학했습니다. 줄여서 ACE라고 불렸죠. ACE는 컴퓨터 과학, 전기공학, 예술 실기, 비평 이론을 결합한 프로그램으로, 현대 기술에 대해 깊고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독특한 학문적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캠퍼스를 방문했다면, 아마 우리 소규모 코호트—단 6명이 전부였습니다!—가 과학 도서관 뒤편, 여러 작업실과 낡은 트레일러가 얽혀 있는 공간 어딘가에 숨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 겁니다. 그 작은 메이커 스페이스에서 우리는 아주 다양한 실습과 지적 활동에 몰두했어요. 회로 기판에 납땜을 하고, 금속판을 용접하고, 철학 논문을 읽고, 사회 구성주의 이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죠.
ACE에서 제가 가장 사랑했던 점은 ‘프락시스(praxis)’, 즉 이론적 아이디어를 의식적으로 실천에 적용하는 행위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ACE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어요 — 행동하며 배우는 것. 우리는 높은 차원의 이론을 탑 안에서 입으로만 논하는 데 그치지도 않았고, 예술 작품이나 전자적 오브젝트를 만드는 손에만 의존한 실습 중심 교육에도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이 두 방식의 상호작용, 즉 몸과 생각이 함께 작동하는 배움이 우리의 작업이었죠. 매우 체화된(embodied) 학습이었습니다.
실제로 제 논문 지도교수이자 ACE 프로그램 창립자인 사이먼 페니(Simon Penny)는 마음과 몸의 실천을 이원론적으로 나누는 데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실천(practice)과 이론(theory)의 차이는, 이론 속에서보다 실천 속에서 훨씬 더 크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차이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직접 해보는 것이었죠.
그리고 정말, 이 프로그램에 있던 사람들은 기막힌 일들을 해냈습니다. 졸업생 중 한 명은 밴드 OK Go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한 유명한 루브 골드버그 머신을 설계하고 제작했어요. (그리고 스티븐 콜베어 쇼에 나간 버전도 만들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바퀴벌레가 조종하는 로봇을 만들었고, 또 다른 사람은 이후 페로플루이드(ferrofluid)를 활용한 조각 작품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반면 저는… 그저 다시 소프트웨어 제작으로 돌아갔습니다. (꽤 심심한 선택이었죠.)
석사 학위를 마친 뒤, 사이먼은 제게 박사 과정 진학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학계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어요. 저는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ACE가 특별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 우리에게 무언가를 만들고, 장인정신을 실천하는 것을 장려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곧 깨달았습니다. 학계에서 이런 문화는 규칙이 아니라 예외라는 것을요. 대부분의 학문 환경은 ACE와 달리, 결과물을 만드는 것을 장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떠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산업계로 와보니, 상황이 정반대로 기울어 있다는 것을 자주 느꼈습니다. 실천은 넘치지만, 이론은 거의 없는 상태였죠.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디자인하고 만들지만, 그 과정에 깔린 숨겨진 전제, 아이디어, 말로 하지 않아도 작동하는 이론들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설령 이야기를 나눈다 해도, 그 대화는 얕게 스치고 지나갈 뿐—제가 대학원 시절에 누렸던 깊이와 풍부함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 문제는 특히 디자인의 윤리적 함의를 다뤄야 할 때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AI 관련 디자인에서는 이런 윤리적 질문과 씨름해야 할 일이 매우 자주 생기니까요. 그러나 윤리를 넘어, ‘인간 경험’ 자체와 씨름하는 문제—예를 들어, 우리가 “보이지 않는 인터페이스(invisible interface)”라는 말을 할 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시스템 오류나 붕괴 상황을 고려한 디자인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이런 논의 또한 철학적 관점이 개입될 때 훨씬 더 풍부해지고 명확해집니다.
최근 저는 실천 중심의 환경에 깊이 잠겨 지내다 보니, 다시금 이론적 통찰과 대화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학이라는 풍부한 지적 자원을 스스로 탐구해보고, 그 여정에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함께 초대해보면 어떨까 하고요.
‘디자이너를 위한 철학(Philosophy for Designers)‘은 인간의 경험과 인간의 가치를 모두 존중하는 디지털 기술 디자인을 위해, 그 이론적 토대를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보통 서로 다른 영역에 머물러 있는 두 철학 전통—현상학(살아있는 경험에 관한 철학)과 윤리학(올바른 행동에 대한 탐구)—을 함께 다룹니다. 여기에 더해, 4E 인지 이론으로 알려진 인지과학의 관점도 조금 곁들일 예정입니다.
철학, 디자인 이론, 인지과학, 기술 비평에 걸친 다양한 저작들을 통해, 저는 인간적이면서도 진정으로 ‘인간다운(humane)’ 기술 디자인을 위한 이론적 도구 상자를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저는 이 전체를 “코스(course)”라고 부르는 데는 좀 망설여집니다. 그보다는 여러 개의 ‘퀘스트(quest)’로 이루어진 개인적 여정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각 퀘스트는 하나의 특정 주제를 다룰 것입니다. 출발점으로 정해둔 읽기 목록이 있긴 하지만,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방향을 수정해야 하거나, 전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예상치 못한 주제를 파고드는 사이드 퀘스트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사이트의 Notes 섹션에 Philosophy for Designers 가이드를 올려두었습니다. 앞으로 여정을 이어가며 그 내용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할 예정이고, 약속드린 대로 읽고 배우는 과정에서 영감을 얻은 에세이들도 정기적으로 작성해 공개하겠습니다.
제 첫 번째 퀘스트는 기술과 디자인 맥락에서의 현상학의 기초에 초점을 맞출 예정입니다. 제가 현상학부터 시작하기로 한 이유는, 더 나은 도구를 디자인하려면 먼저 인간이 기술을 실제로 어떻게 경험하는지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상학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바로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기술은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고, 행동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꿉니다.
그래서 우선 저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유크 후이(Yuk Hui), 후버트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와 같은 사상가들의 저작을 읽을 계획입니다. 이들 중 일부는 대학원 시절에 접해본 적 있지만, 많은 부분이 저에게도 새로운 영역일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디자이너이거나 기술 개발자로서 저와 함께 이 여정을 읽고 따라가 보고 싶다면, 알려주세요. 관심이 충분히 모인다면, 함께 토론할 수 있는 기회와 포럼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일단 지금은 읽을 목록도 준비되었고, 탐구할 질문들도 분명합니다. 이제, 여정을 시작해보려 합니다.